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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강 건넌 아르헨티나, 이번엔 다르다

흔히 택시 기사들의 여론을 ‘민심의 풍향계’라 한다. 서민층에 속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체감하기 때문이다. 그럼 부에노스아이레스 택시 기사들은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개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본지 취재팀이 지난 3월 33회에 걸쳐 현지 택시와 우버를 이용하면서 직접 설문한 결과 32명이 지지를 표명했다. 밀레이를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 묻자 모두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압도적으로 밀레이 편이다. 우버 드라이버 다니엘 에두아르도는 “이번에 바뀌지 않으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기사 앤젤 프란스시코도 “많은 것이 바뀌고 있고, 사람들도 점점 희망을 갖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감대는 확실해 보인다. 실패한 포퓰리즘 경제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다들 알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차 세우고 반정부 시위대에 합류할 법한 택시 기사들이 외려 밀레이를 지지하는 이유다. 이들은 과거 대부분 페로니스트 정부 지지층이었으나, 이젠 돌아섰다고 한다. 포퓰리즘 정책의 실패에 따른 피해를 처절하게 경험한 계층이기에 노선 변화가 두드러진 것이다.   좌파 페로니즘 정권에서 산업부 산업정책국장(2019~22)을 지낸 레안드로 모라 알폰신도 이런 정서를 인정한다. “40년의 민주주의를 지나면서도 약 45%가 기본 생계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기존의 방식을 바꾸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대중의 기대감은 커지고 있다. 물가, 성장률, 빈곤율 등 각종 통계가 부쩍 개선되자 긴가민가하며 관망하던 여론층도 개혁에 호감을 보이게 됐다. 밀레이 정부는 그들에게 과거보다 미래를 얘기한다. 페데리코 스투르제네거 규제개혁장관은 지난 13일 “향후 15년간 매년 4%씩 꾸준히 성장하면 아르헨티나 국민소득은 스페인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라틴 아메리카 정치경제학자인 마리아노 토마시 산안드레스 대학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십 년간의 침체와 실정에 반발한 국민은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을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었는데, 이게 밀레이의 스타일과 맞아떨어졌다. 특히 그의 이념적 일관성은 밀레이 개인뿐 아니라 그의 정책적 방향에 일정 수준의 신뢰성을 주고 있다.”   밀레이를 향한 대중의 지지는 개혁에 대한 갈구의 표출이다. 밀레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지금의 개혁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저변에 깔렸다. 실패는 곧 끔찍한 과거로의 회귀를 뜻한다는 걸 다 알기 때문이다. 킨토 투자자문의 바우티스타 부르디외 애널리스트는 “현재 추진 중인 정책과 변화가 실패한다면, 아르헨티나는 과거의 인플레, 부채 위기, 빈곤의 악순환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밀레이는 경제에서만 득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기득권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공격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국회의원 특권 축소가 대표적이다. 라디오 방송 진행자인 조엔나 메사 알퍼트는 “그동안 아무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그 점에서 정말 긍정적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했다는 점에서 존경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선 아르헨티나인에게 ‘밀레이가 성공할까’라는 질문은 차라리 우문에 가깝다. “그렇게 물으면, 밀레이가 실패하면 안 된다고 답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거다. 나도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밀레이가 꼭 성공하길 바란다. 페론주의자들도 알 거다. 자기들도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꼭 성공하면 좋겠다.”(물류회사 LK글로벌 강태민 대표)   두터운 지지를 의식해서인지 밀레이는 과격 시위대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고 있다. 과거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 형식적으로라도 요구를 받아들이곤 했는데, 지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야당을 설득하려는 자세도 안 보인다. 자유지상주의 개혁 정책에 타협이란 없다. 최고 권력기관인 정부 자체를 혐오하는 무정부주의 성향의 밀레이가 파쇼라는 형용모순적 비난을 받는 이유다.   그가 임기 중 개혁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것이라는 데 대해선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정치적으로 큰 분기점인 오는 10월 중간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밀레이 여당의 승리가 예상된다. 지금의 여소야대 구도가 뒤집어지거나, 여당 의석수가 두드러지게 늘 경우 개혁엔 더 탄력이 붙을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의 칼럼니스트 릴리아나 프랑코는 “정치 분석가들은 밀레이의 자유전진당이 여러 의석을 추가로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야권이 상당히 분열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가전메이커 피바디의 최도선 회장도 “중간선거에서 밀레이가 압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야당에서 밀레이에 대적할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페론당은 나라를 망쳐놨기 때문에 그렇다.”   문제는 그 다음, 즉 밀레이가 임기를 마친 뒤다. 자유지상주의 개혁의 관성은 유지될까, 아니면 포퓰리즘의 기운이 다시 고개를 들까.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변동사에 해박한 토마시 교수는 다소 조심스러운 견해다. “밀레이가 야심 찬 개혁의 일부를 성공적으로 실행하더라도, 향후 정권 교체에 따른 정책 후퇴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은 큰 리스크로 남아 있다.”   과거 아르헨티나의 정정불안을 감안한다면 일리 있는 말이다. 개혁의 실패, 또는 개혁 피로감 탓에 정권이 바뀐다면 과거로의 회귀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밀레이의 개혁 정책이란 것도 무슨 대못을 박아둔 게 아니다. 자른 공무원들이야 다시 고용하면 되고, 줄인 정부부처도 금방 되살릴 수 있다. 틀어막은 보조금 다시 푸는 건 일도 아니다. 규제 역시 다시 법령 만들어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경제 현장에선 자유지상주의 개혁을 되돌릴 수 없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방향이 옳고, 성과가 확실한 데다, 많은 국민이 이에 적응했다는 이유에서다. 국민의 생활과 시장의 흐름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것이다. 정권 교체 이후에도 개혁은 나름의 관성을 타고 비가역적으로 굴러갈 것이라는 뜻이다.   아르헨티나 최대 회계법인 리식키 리트빈의 세자르 리트빈 대표는 “밀레이의 후임자가 그 비전을 이어갈지가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예전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밀레이가 워낙 많이 바꿔놨고, 이젠 사람들이 거기에 제법 익숙해져 있다.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와 결이 다른 사람들도 지속가능성을 높게 본다. 페로니스트 정부에서 산업부 장관(2019~22)을 지냈던 마티아스 쿨파스는 “개혁의 일부는 지속가능하다. 특히 재정준칙과 원칙적인 통화관리는 앞으로도 오래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하이퍼 인플레이므로, 그 원인이었던 방만재정과 현금 살포를 다음 정권이 답습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포퓰리즘의 실패를 겪을 만큼 겪은 국민은 과거로 돌아가는 게 어떤 뜻인지 잘 안다. 아르헨티나를 유럽 수준의 국가로 만들자는 밀레이의 비전은, 그래서 공감을 얻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에선 ‘이번엔 다르다’는 시민들의 기대감을 체감할 수 있다.     남윤호·장열 기자아르헨티나 개혁 아르헨티나 국민소득 밀레이 정부 하비에르 밀레이

2025-05-15

개혁은 비포장길…긴축 고통에 저항도 여전

[특별기획] 1. 아르헨 살린 '전기톱' 개혁 2. 100년 전 선진국의 몰락 3. 리버태리언 밀레이는 누구 4. 페로니즘의 향수는 아직도 5.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대로 그냥 죽으라는 거냐.”   시위대 맨 앞에서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 나온다. 지난 3월12일 오후 아르헨티나 국회의사당 앞. 연금개혁 반대 시위대의 밀라그레스 에레라(41)는 “어머니가 무료로 약을 받았는데 정부가 빼앗아갔다”고 목청을 높였다. 시위대는 ‘또라이 자유주의자’라는 “리베르톤토(Libertonto)”를 연신 외쳐댔다.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향한 욕이다.   훌리건과 전문 시위꾼들이 가세해 폭력 시위로 번지자 경찰은 물대포·최루탄·고무탄으로 진압했다. ‘맑은 공기’라는 뜻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은 매캐한 최루가스와 펑펑 터지는 고무탄 발사음으로 뒤덮였다. 현지 사진기자 파블로 그리요는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중태에 빠졌다. 본지 취재팀 장열 기자도 종아리(사진) 등에 고무탄 세 발을 맞았다.     30년간 미래로여행사를 운영 중인 정유석 대표는 “페론당의 퍼주기 정책에 길들었는데, 밀레이가 바꾸려다 보니 반발이 심하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일부에선 페로니즘의 향수를 못 버리고 있다. 놀면서 쉽게 보조금을 받았는데, 갑자기 끊으니 반발할 수밖에. 우버 기사 메히야 헤리베르토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밀레이를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욕한다”고 했다.     개혁의 금단현상은 주로 취약계층에서 비대칭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그 고통의 신음은 매주 수요일 열리는 시위에서 연신 터져 나온다. 다만, 격렬한 시위 현장에만 빠져들면 개혁에 호응하는 또 다른 큰 흐름을 놓치기 쉽다. 아르헨티나 최대 회계법인 리식키리트빈의 세자르 리트빈 대표는 나무와 숲을 함께 보라고 한다.     “정부 보조금에 기대 살려던 사람들이 저항하는데, 그 수는 점점 줄고 있다. 그들이 많지는 않지만 대단히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다. 자신의 몫을 침해당한다는 의식, 자신의 삶이 바뀐다는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저항하고 시위하는 것이다.”   긴축에 대한 반발은 시위로만 표출되는 게 아니다. 불만과 저항심리가 뭉근하게 끓고 있는 곳이 있다. 교육 현장이 그렇다. 밀레이 취임 직후 교육부는 졸지에 타 부처에 흡수되고, 대학 보조금도 끊겼다. 국립대의 연구 프로젝트, 캠퍼스 공사들이 딱 멈춰섰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에서 북서쪽 30마일 거리의 국립대 UNPAZ도 그런 케이스다. 짓다 만 캠퍼스 건물이 가림막으로 둘러쳐져 있다. 최신 체육시설을 만들어 학생과 지역주민에게 개방할 예정이었는데 예산이 끊겨 중단 상태다. 다리오 쿠신스키 총장은 답답해한다. “대학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 있다. 그간 정부가 대학의 교육과 연구를 다 지원해 왔다. 이게 밀레이 때문에 끊겼다. 가장 좋은 투자가 연구개발인데 그걸 못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 역시 밀레이를 곱게 볼 수 없다. 본관 로비 벽면엔 온통 페로니스트와 좌파 단체 포스터들로 빼곡하다. UNPAZ는 서민층 자제들의 고등교육을 지원하는 대학으로, 재학생 대부분이 집안의 첫 번째 대학생들이다. 재학생 칸델라리아(23)는 “과거 어느 정부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 신경을 안 썼지만, 밀레이 정부는 특히 서민층을 돌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개혁을 환영한다는 재계에서도 각론으로 들어가면 불만이 적잖다. 특히 법인세나 준조세보다 관세를 덜커덕 먼저 내린 탓에 수입품이 밀려들어 국내기업 다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이다.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산업연합회(UIA) 마르틴 라팔리니 회장은 “자유롭게 경쟁하라면서 국내 기업들만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건 외국 기업들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도 진짜 경쟁하고 싶다”는 말을 서너 차례 반복했다.   개혁의 큰 성과인 페소화 안정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니다. 페소 강세의 그늘이 슬슬 짙어지고 있다. 수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입품이 밀려들고 있다. 쇠고기 먹으러 여행 간다는 아르헨티나에 곧 쇠고기가 수입될 판이다. 해외소비는 성큼성큼 늘어 지난 1월 해외 신용카드 사용액이 7년만에 최고치(6억4500만 달러)를 찍었다. 그러니 경상수지 적자는 자꾸 불어 가뜩이나 모자라는 외환보유액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3월 경상수지 적자는 16억7400만 달러로 밀레이 취임 후 최대폭이었다.   그런데도 페소가 강세인 건 정부의 개입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이 강력하고, 시장도 이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유지상주의자 밀레이도 외환시장만큼은 꽉 움켜쥐고 있다. 이게 과도기적 역설인지, 곧 깨질지 모를 살얼음판인지, 시간이 좀 지나봐야 알 수 있다.   개혁 성과를 유보적으로 보는 이들도 적잖다. 최근의 개선된 거시경제는 충격요법에 따른 반짝효과라는 논리다. 한국의 산업은행 격인 방코 나시옹의 에두아르도 헤커 전 행장은 ‘표면적’이라고 평가한다. “국제 경쟁력은 더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통해 확보되는데, 아직 그런 변화가 시작되지도 않았고, 경제를 보다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다.”     페로니스트 정부에서 산업부 장관(2019~22)을 지냈던 마티아스 쿨파스는 과도한 긴축의 영향을 지적한다. 밀레이의 긴축은 너무 가혹해 인프라, 연구개발 등 미래를 위해 필수적인 부문에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또 에너지 보조금 삭감에 따른 부담이 가계 부문으로 전가되고 있다고 했다.   “도로, 교량 등 인프라가 빠른 속도로 노후화되고 있다. 얼마 전 바릴로체에 휴가 갔다 움푹 팬 도로 때문에 사고당할 뻔 했다. 에너지 보조금 삭감은 가계의 구매력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며, 경제 성장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쿨파스와 같은 시기에 산업부 산업정책국장을 역임한 리안드로 모라 알폰신도 현재 상황을 “매우 우려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극단적인 정책 추진으로 갈등과 대립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국민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과 관련된 문제에 부딪혀 결국 한계를 맞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래된 생활의 타성과 깊이 뿌리내린 인식을 바꾸긴 쉽지 않다. 어느 나라, 어느 방향의 개혁에서도 반발과 저항은 거쳐야 할 과정이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에선 다른 나라엔 없는, 특이한 정서가 개혁의 발목을 끈끈하게 휘감고 있다. 바로 에바 페론에 대한 향수다.   페로니즘이라 하면, 후안 페론 전 대통령보다 두 번째 부인 에바 페론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는 1940~50년대 서민과 노동자들의 우상이었다. 강한 카리스마의 연설과 통 큰 복지로 성녀처럼 추앙받았다.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뭐든 다 해주겠다는 국모로서의 시혜가 국가 복지정책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포퓰리즘으로 번졌다. 그 달콤한 온정이 국가 쇠락의 연결고리였다는 점은 잊혀진 채 낭만적 회고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 자취는 지금도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에바 페론 묘소(사진)엔 늘 꽃다발이 놓여 있다. 내외국인 모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오면 꼭 거쳐가는 성지가 돼 있다. 국회의사당엔 그를 기념하는 여성의원 전용 회의실도 마련돼 있다. 에바 페론의 초상·유품·흉상이 전시돼 있다. ‘에바 페론’ 간판을 내건 레스토랑·술집도 성업 중이다. 이곳엔 어김없이 페론 부부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대학생들로 북적이는 UNPAZ의 본관 로비엔 페론 부부를 그린 현수막과 배너가 많이 붙어 있다.      또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부의 보건부 청사엔 높이 31m짜리 에바 페론의 금속 초상(사진)이 한쪽 벽면을 덮고 있다. 페로니즘의 상징물이자, 누구나 한 번쯤 둘러보는 관광코스다. 택시 기사 다니엘 에두아르도(61)가 “밀레이가 곧 허물지 모르니 기념사진을 찍어두라”고 했다. 밀레이 정부는 그동안 보건부 청사 철거 계획을 내비쳐 왔다. 페로니즘의 색채를 빼려는 시도다. 살아 있는 밀레이가 죽은 에바 페론을 의식하고 있다.   뮤지컬 ‘에비타’의 ‘Don’t Cry for Me Argentina'는 그의 헌신을 찬미했지만, 아르헨티나는 지금 그 향수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다. 페로니즘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개혁의 길은 어차피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다. 하지만 그 끝엔 포퓰리즘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질지 모른다. 문제는, 과연 아르헨티나가 그 지점까지 개혁을 지속할 수 있느냐다. 밀레이의 임기와 무관하게.     관련기사 밀레이 ‘전기톱 개혁’ 아르헨티나를 살렸다 자유주의가 하지 말라는 일 골라 하다 몰락 탈세가 미덕이라는 골수 자유주의 대통령   □ 도움말 주신 분(무순) 기예르모 모레노 (원칙과가치 당대표)   마르틴 라팔리니 (산업연합회 회장) 세자르 리트빈 (회계법인 리식키 리트빈 대표)   에두아르도 헤커 (전 방코나시옹 행장)   마티아스 쿨파스 (전 산업부 장관)   릴리아나 프랑코 (부에노스아이레스헤럴드 칼럼니스트) 다리오 쿠신스키 (UNPAZ 총장)   실비나 카탈디 (UNPAZ 국제국장)   마리아노 토마시 (산안드레스대학 교수) 엘리오 델레 (금속산업협회 회장)   리안드로 모라 알폰신 (전 생산개발부 산업정책국장)   루시아노 볼리나가 (아우스트랄대학 아시아연구센터 소장)   알레한드로 젠타일 (테친그룹 디렉터) 바우티스타 부르디외 (킨토투자자문 애널리스트) 에르난 로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출판사)   구스타보 에이리즈 (라플라타 시립 오케스트라 비올리스트)   마르티나 이바르 (케네디대학)   엘피나 로한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학생)   알레한드로 김 (변호사)   조애나 메사 알페르트 (콘덕토라 칼럼니스트) 이용수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 유정아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 참사관)   남선우 (코트라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 배성용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 부관장)   최도선 (피바디 회장)   정유석 (중남미한상연합회 대표)   강태민 (LK글로벌 대표) 케빈 강 (LK글로벌 이사)   양수민 (강남익스프레스 대표)   김광복 (전 포스코 아르헨티나 법인장)   김미숙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문화원장) 정세훈(신성교회 목사) 고훈 (신성교회 장로) 박진성 (사업가)   조연미 (사업가)   황진이 (변호사)   이 우리엘 (포스코)   캐롤라인 김 (부에노스아이레스 병원 의사)   김소희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생) 부에노스아이레스=남윤호·장열 기자비포장길 여전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 밀레이 취임 하비에르 밀레이

2025-05-14

밀레이 ‘전기톱 개혁’ 아르헨티나를 살렸다

[특별 기획]   1. 아르헨 살린 '전기톱' 개혁 2. 100년 전 선진국의 몰락 3. 리버태리언 밀레이는 누구 4. 페로니즘의 향수는 아직도 5.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한국에게 아르헨티나는 훌륭한 거울이다.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국민이 온통 깡통을 찰 수도, 그러다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포퓰리즘으로 거덜 나, 툭 하면 부도내고, 국제통화기금(IMF)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골칫덩이… 우리가 알던 아르헨티나는 더 이상 없다. 2023년 12월 취임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개혁 이후로 말이다.   개혁의 핵심은 대대적인 긴축과 광범위한 규제 철폐다. 포퓰리스트 정부가 뭉텅뭉텅 나눠주던 보조금과 선심성 지출을 틀어막았다. 18개 정부 부처를 8개로 줄이고, 공무원 4만2000여명을 내보냈다. 취임 후 하루 2개꼴로 규제를 없앴다. 트럼프 정부가 공공지출 삭감, 규제 철폐, 행정 간소화를 위해 정부효율부(DOGE)를 둔 것도 밀레이의 개혁에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수십 년간 앓던 고질병들이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다. 2023년 말 월 25%였던 인플레는 2~3%대로 떨어졌다. 재정은 14년 만에 첫 흑자를 냈다. 성장률은 올해 5.5%를 무난히 달성할 전망이다. 또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취급받던 페소는 유례없는 강세다. 해외 투자자들의 시각이 달라지면서 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지금은 달러를 팔고 페소를 살 때’라고 했다.   포퓰리즘을 때려잡고 완전히 다른 나라로 나아가려는 아르헨티나의 현장을, 미주 한인 언론 최초로 취재했다.       ━   포퓰리즘 대수술, 물가 잡고 성장률 높였다      아르헨 살린 밀레이 ‘전기톱 개혁’ ①    재정지출 30%, 공무원 4만명⭣ 월 25.5% 인플레가 1% 눈앞 경제, 페로니즘 수렁서 회복세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리다 거리. LA로 치면 다운타운의 브로드웨이 거리와 비슷한 곳이다. 쇼핑몰, 기념품점, 레스토랑, 호텔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여기저기 큰 목소리로 “캄비오(환전)”를 외치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암달러상들이다.   하지만 이들과 흥정하는 관광객은 보기 어렵다. ‘블루 달러’라 불리는 암달러 환율과 공식 환율의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2023년 말 25% 정도, 그 전엔 배에 달했던 게 말이다. 4월 말 이후엔 가끔 암달러가 더 싸지는 날도 있다. 지난 8일 은행의 공식 환율은 달러당 1138페소(소매 기준), 암달러 환율은 1170페소였다.   암달러상은 외환 통제를 먹고 산다. 외환 수급이 원활하고 시장이 안정되면 굳이 암달러상을 찾을 일이 없다. 플로리다 거리에서 빈손으로 돌아서는 ‘캄비오’들은 통제에서 개방으로, 불안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잘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에선 이를 ‘밀레이 효과’라고 부른다.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취임 이후 일관성 있게 추진한 자유지상주의 개혁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리버태리언 밀레이의 논리는 명확하다. 선심 정책 탓에 재정이 거덜 나고, 하이퍼 인플레가 일어났다. 따라서 이를 잡으려면 긴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퍼주기 복지, 방만 재정, 철밥통 공무원, 밑도 끝도 없는 보조금 … 뭐든지 전기톱으로 썰어내겠다고 공약했다. 과거 정부가 개혁 시늉을 할 때 쓰던 소품이 가위였던 데 비해 굉음을 내는 전기톱은 대중에게 그의 의지를 각인시켰다. 밀레이는 미국의 일론 머스크와 친해 올 초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던 그에게 전기톱을 선물했다.   그는 당장 보조금과 복지성 경비 등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정부조직도 확 줄였다. 18개 부처 이름을 적은 테이프를 보드에 붙여놓고 “꺼져(¡Afuera!)”라고 소리치며 하나하나 잡아떼는 퍼포먼스는 유명하다. 취임 후 15개월간 전체 공무원의 8.4%인 4만2000여 명을 내보냈다. 이래저래 재정지출을 단번에 30% 줄였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국채를 인수하던 것도 끊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개혁의 성과를 평가해 지난달 20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1년여 만에 거시지표들이 모두 좋아지기 시작했다. 인플레는 잡히고, 성장률은 오르고, 통화가치는 높아지고, 빈곤율은 떨어지고,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다. 사람으로 치면 독한 몸만들기로 혈압, 당뇨, 콜레스테롤이 두루 개선된 셈이다.     최대 성과는 역시 물가 안정이다. 보통 물가가 1년에 두 자리 수로 뛰면 나라가 흔들리지만, 아르헨티나에선 한 달에 두 자리 수도 예사였다. 땔감 사는 것보다 지폐를 태우는 게 싸다고 할 정도의 하이퍼 인플레였다. 그러던 게 이젠 월 1%대가 가시권에 들어왔다. 1976년 이민 와 물류사업을 하며 역대 정권을 겪어본 LK글로벌 강태민 대표는 “인플레를 잡은 건 과거 아르헨티나를 되돌아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다.     물론 인플레가 잡혔다고 물가수준이 낮은 건 아니다. 외국인이 느끼는 달러 환산 물가는 의외로 높다. 올초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빅맥 지수에 따르면 아르헨티나가 미국보다 약 20% 높았다. 플로리다 거리 선물가게에선 젊은층에 인기인 스탠리 텀블러에 11만6500페소라는 가격표를 붙여놨다. 취재 시점(3월14일)의 환율로 약 97달러. 미국 판매가의 거의 세 배다. 근처 나이키 매장에선 ‘보메로(vomero) 17’ 모델을 31만4999페소(262달러)에 판매하고 있다. 미국보다 100달러를 더 줘야 한다. 시간당 2.3~3.2달러인 최저임금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높은 가격대다. 스페인에 근무했던 코트라의 남선우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은 “이곳 물가가 3년 전 마드리드보다 비싸다”고 말한다. 또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의 유정아 참사관도 “제네바 근무 시절의 체감물가와 비슷하다”고 한다.     성장률은 지난해 하반기 플러스로 돌아섰다. IMF는 2024년 성장률을 -2.8%로 예상했으나 가속이 붙어 -1.7%로 높아졌다. 올해 전망치는 5.5%로 급반등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의 칼럼니스트 릴리아나 프랑코는 “IMF 전망에 대해 경제학자들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며 “예상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최대 회계법인 리식키리트빈의 세자르 리트빈 대표는 “내년 이후에도 비슷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10년 넘게 제자리 걸음이던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한다는 건 큰 변화다. 정부통계국(INDEC)에 따르면 2024년 민간부문 정규 근로자는 660만 명이다. 2013년에 비해 불과 20만 명 증가한 데 그쳤다. 아르헨티나의 고용탄성치가 0.6이므로 밀레이의 남은 임기 3년 간 같은 수준으로 죽 성장한다면 고용은 매년 3.3%씩 모두 10%쯤, 약 67만 명 증가하게 된다.   잠시 높아졌던 빈곤율은 뚝 떨어졌다. 초기 공공부문 실업자들이 쏟아지자 야당은 나라가 더 가난해졌다고 거품을 물었다. 소득이 기본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가구의 비중으로 측정하는 빈곤율은 지난해 중반 52.9%로 치솟았다. 그 뒤 물가 안정과 고용 회복으로 최근 38.1%로 낮아졌다. 자유지상주의 개혁이 빈곤을 양산한다는 비난은 힘을 잃었다.     물론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선 노숙자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을 부각시킨 언론보도만 보면 마치 경제위기라도 온 듯하지만, 실제론 다르다. 그 숫자나 밀도에서 ‘노숙자 천국’ LA와는 비할 바가 못된다.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걸 체감할 곳은 많다. 유명 레스토랑은 미국 수준의 가격임에도 예약하기 어렵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극장 테아토르 콜론의 주말공연 티켓 역시 구하기 쉽지 않다.   본격적인 규제철폐로 일상생활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주거환경이다. 월세를 눌러놓고, 세입자 못 내보내게 하던 임대규제를 밀레이 정부가 싹 없앴다. 세입자 보호는커녕, 임대물건을 줄이고 임대료를 폭등시켜 원성이 자자한 규제였다. 가주의 세입자보호법(AB1482), LA시의 임대 안정화 조례도 그와 비슷하다. 1년도 채 안 돼 임대물건은 170% 늘고, 임대료는 40% 떨어졌다. 지난해 대선 때 카말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가 비슷한 임대 규제를 공약하자, 월스트리트저널이 이를 비판하며 모범사례로 든 게 밀레이였다.   시장이 살아나자 기업들은 움직이기 수월해졌다. 엘리오 델레 금속산업협회 회장은 “거시경제가 정돈되면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졌고, 개방에 속도가 붙었다”고 말했다. 통관, 인증, 대금 지급 절차는 몰라보리 간소화됐다. 과거엔 수입 승인을 받으려면 중앙은행에 서류를 제출하고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지금은 웬만하면 48시간 안에 허가가 난다.  남선우 무역관장은 “무역대금 지급규제가 많이 풀려 기업들이 크게 반긴다. 투자 문의도 몰라보게 늘었다”고 전했다. 자유지상주의는 포퓰리즘에 오염된 경제토양에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다. 관련기사 탈세가 미덕이라는 골수 자유주의 대통령 자유주의가 하지 말라는 일 골라 하다 몰락 밀레이 ‘전기톱 개혁’ 아르헨티나를 살렸다     ━   □ 도움말 주신 분(무순)   기예르모 모레노 (원칙과가치 당대표)   마르틴 라팔리니 (산업연합회 회장) 세자르 리트빈 (회계법인 리식키 리트빈 대표)   에두아르도 헤커 (전 방코나시옹 행장)   마티아스 쿨파스 (전 산업부 장관)   릴리아나 프랑코 (부에노스아이레스헤럴드 칼럼니스트) 다리오 쿠신스키 (UNPAZ 총장)   실비나 카탈디 (UNPAZ 국제국장)   마리아노 토마시 (산안드레스대학 교수) 엘리오 델레 (금속산업협회 회장)   리안드로 모라 알폰신 (전 생산개발부 산업정책국장)   루시아노 볼리나가 (아우스트랄대학 아시아연구센터 소장)   알레한드로 젠타일 (테친그룹 디렉터) 바우티스타 부르디외 (킨토투자자문 애널리스트) 에르난 로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출판사)   구스타보 에이리즈 (라플라타 시립 오케스트라 비올리스트)   마르티나 이바르 (케네디대학)   엘피나 로한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학생)   알레한드로 김 (변호사)   조애나 메사 알페르트 (콘덕토라 칼럼니스트) 이용수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 유정아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 참사관)   남선우 (코트라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 배성용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 부관장)   최도선 (피바디 회장)   정유석 (중남미한상연합회 대표)   강태민 (LK글로벌 대표) 케빈 강 (LK글로벌 이사)   양수민 (강남익스프레스 대표)   김광복 (전 포스코 아르헨티나 법인장)   김미숙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문화원장) 정세훈(신성교회 목사) 고훈 (신성교회 장로) 박진성 (사업가)   조연미 (사업가)   황진이 (변호사)   이 우리엘 (포스코)   캐롤라인 김 (부에노스아이레스 병원 의사)   김소희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생) 부에노스아이레스=남윤호·장열 기자, 사진=김상진 기자아르헨티나 밀레이 아르헨티나 경제 전기톱 개혁 하비에르 밀레이

2025-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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